<파리, 텍사스>는 1984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주인공 트래비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미국 텍사스주와 L.A를 넘나드는 로드무비이다. 세계적인 밴드 트래비스도 이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주인공의 이름인 트래비스로 밴드명을 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텍사스 특유의 광활한 황야가 쓸쓸하게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주인공인 트래비스가 등장하는데 외형이 가관이다. 아직 숨만 끊어지지 않은 산송장이라 표현하는게 어울릴 정도로 비루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 삶에 대한 아무 의욕이 없어보이고 함구증인지 기억상실증인지 쇼크를 먹었는지 아니면 이 세가지를 동시에 겪었는지 말도 못하고 지난 날에 대한 기억도 없고 눈빛은 무기력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과연 트래비스에겐 어떠한 일이 있었고 어떻게 갱생을 할 수 있을까. 갱생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역시 그의 아들인 헌터이다. 어떠한 일련의 사건 이후 돌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트래비스가 그의 동생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비추게 되고 아들을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된다. 삶에 대한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떠돌아 다니기만 했던 트래비스가 세상의 제궤도를 향해 다시 한 번 움직이게 되는 순간이다. 트래비스는 헌터를 본 후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아들에게 자신이 아빠로 비춰지고 싶은 것이고 4년 전에 하지 못한 아빠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삶의 이유가 된다. 다행히 아주 사랑스러운 헌터도 트래비스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이내 마음을 열게 되고 트래비스는 잃어버렸던 말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되찾게 된다. 여기까지는 아주 수조롭게 진행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 로드무비답게 트래비스와 헌터는 그의 아내이자 그의 엄마인 제인을 찾으러 간다. 트래비스도 분명 아들을 되찾은만큼 아내 또한 되찾아 지난날의 과오를 잊고 여느 가정처럼 다시 한 번 가정을 꾸리고 제인과 헌터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인을 찾으러 갔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헌터만큼 제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쩌면 제인만이 자신의 갱생을 완성시켜줄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4년의 시간이 흐른만큼 많은 것은 달라져 있었다. 생각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4년 전에 가정이 두동강나고 트래비스 본인만 방황을 했을 거라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방황을 하고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간 이는 다름 아닌 제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게 변했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제인이란 존재가 더 필요한건 헌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했고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일도 때려치고 24시간 동안 그녀의 옆에서 함께 했고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만 같고 아무 물증없는 의심만 커져 급기야 제인을 줄로 묶어 집에 가둬 놓는 정신병적 행동까지 하게 된 4년 전의 트래비스. 트래비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인은 자신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만이 그녀와의 사랑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 순간 이미 둘의 사랑은 산산조각난 것이고 그들의 가정 또한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트래비스는 많은 것이 바뀐 자신과 제인 그리고 헌터의 주변환경과 관계속에서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제인을 향한 자신의 집착이었다. 그렇다면 제인을 다시 만나 가정을 꾸려도 그녀를 가둬 놓을게 분명하단 걸 알기에 그리고 자신보다 지금 제인이란 존재가 더 필요한 건 헌터란 것 또한 알기에 트래비스는 둘을 이어주고 그 순간을 확인한 채 유유히 또 어디론가 떠난다. 이것이 4년이 지난 후의 남편 그리고 아빠 트래비스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트래비스는 제인과 헌터 즉 자신이 이뤄낸 가족을 통해 보다 성장을 했고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떠돌아다니는건 4년전과 같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더이상 실패한 사람처럼 삶을 내려놓고 살진 않을 거란 점이다. 그는 트래비스라는 사람이기 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사랑스러운 아들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트래비스는 그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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