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944년 대한민국 충북 음성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 에세이 경시대회에서 수상함으로써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잠시 만난 경험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외교부에 들어갔고 1991년에는 외교부 유엔과장이 되었다. 2004년 대한민국의 외교부장관에 올랐으며 2006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당시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투르르와 경쟁하였다. 결국 수차례 예비투표를 거쳐 최종 후보로 결정되었고 총회의 표결을 거쳐 제8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기후변화, 핵환산 방지, 8가지 새천년개발목표 달성 등을 안정적으로 수행해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피 아난과 같은 적극적 정치가 스타일은 아니지만 중국과 미국 등의 강대국 사이에서 기후 문제 등 민감한 이슈들을 노력하게 협상해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1년 6월에 2012년 1월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임기의 연임 추천 결의안에 대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그는 연임수락연설에서 인류가 어느 국가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무게를 통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대권후보 선호 이유
지난 2011년 6월 21일 이날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UN 총회에서 반기문 총장의 연임이 확정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넬슨 메소네 유엔안보리 의장은 반기문 총장의 연임 추천결의안을 제안했다. 이어 조지프 데이스 유엔총회 의장이 반기문 총장 재선 안건을 공식 상정,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별도의 표결 없이 192개 UN 전 회원국 대표들이 동의하는 표시로 박수를 쳐 연임시켰다. 반기문 총장은 연임수락 인사말에서 수단, 소말리아, 콩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중동 등지의 인권 상황 등을 언급했다. 이어 "세계적으로 어느 때보다 인권을 보호하고 평화를 구축해야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인재 중의 한명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그는 자신의 대선출마 유무 의사와 관계없이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상에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글로벌 인재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유엔사무총장 임기는 오는 2016년 12월에 끝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국내에서의 여론은 의식해서인지 지인에게 "유엔사무총장 임기가 끝난 이후도 해외에 계속 체류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일하는 사무총장, 반기문
반기문 사무총장은 어떻게 회원국의 압박과 유엔 내부의 반발, 세계 언론의 악의적 공격을 강력한 신뢰와 지지로 변화시켰을까. 『반기문,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라는 책은 연임에 성공하고 유엔 역사상 최고의 사무총장이라는 평가에 이른 그의 행보를 가장 가까이에서 밀착 취재한 기록이다. 아시아적 가치로 세계를 움직이는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지구 반대편에서 고군분투하는 그가 대한민국에 보내는 비전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뢰와 인내를 바탕으로 한 설득,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과 겸손, 분쟁과 살육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반기문 총장의 신념은 여러 국제 문제에서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다. 물론 그 바탕에는 어떤 사무총장보다도 부지런히 일하는 성실함이 있었다. 2010년 촉발된 ‘아랍의 봄’을 통해 반기문 총장은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누구보다 빠른 행보로 민주화 세력을 지지했으며 주변국을 부지런히 설득해 독재자 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내기도 했다. 한편, 빈곤구제와 소외된 인권 개선을 위한 반기문 총장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직접 확인하고 행동하며 유엔 우먼 설립, 말랄라의 날 선포, 유엔 내 동생 결혼 인정 등 차별을 공론화 하고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만들어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라는 말처럼 반기문 총장의 리더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진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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