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얼떨결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 신세가 되고 만 나복만의 삶을 이기호 작가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으로 광기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삶과 꿈이 어떤 식으로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에 이은 그의 ‘죄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사과는 잘해요』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죄의식을 다뤘다면 『차남들의 세계사』는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군사정권 아래 뜻하지 않게 수배당한 인물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통해 개인과 국가 사이의 죄와 벌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기호 문학의 모든 것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무거운 소재 앞에서도 이야기꾼의 어조와 호흡을 절묘하게 운용하면서 시종 희비극적이라 해야 할 어떤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기호 작가 소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웃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는 마침내 견디기 힘든 분노와 슬픔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며 웃은 웃음의 양과 비례한다. 그는 슬픈 일을 슬프게 쓰거나 기쁜 일을 기쁘게 쓰지 않고 슬픈 일은 웃기게, 웃긴 일은 슬프게 쓴다. 유쾌하게 비틀어 댄다. 그것이 바로 유머는 이내 감동으로 웃음은 이내 슬픔으로 치환되는 까닭이다. 이기호 작는 이 작품을 2009년 봄에 쓰기 시작해서 2014년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꼬박 6년이 걸린 것이다. 서울, 담양, 무주, 광주, 원주, 우주베키스탄 등을 전전하며 썼다. 왜 이렇게 많은 공간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소설을 쓸 땐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마, 빨리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긴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읽힌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결코 빨리 덮을 수 없다. 이 책을 덮는 데는 아마도 그가 소설을 쓴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는 문체 이종격투기 선수로 불릴 만큼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작들에서 그는 소설 한 편을 전부 랩의 가사로 채우는가 하면, 피의자 조서 형식으로 꾸미기도 하고, 성경의 번역체 어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서와 실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가는 보기 드물다.
비루한 존재들의 삶을 이야기하다
『차남들의 세계사』도 독특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들어 보아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것을 들어 보아라.” “이것을 잘 들어 보아라.” “이것을 똑똑히 들어 보아라.” “이것을 누군가와 함께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이제 막 마지막이구나, 아쉬워하며 들어 보아라.”라고 말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독자가 듣는 방식을 달리하게 만든다. 이기호 작가는 언제나 ‘시봉이’로 대표되는 어딘가 좀 모자라고 어리숙해 보이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애정과 눈길을 보내는 글을 써 왔다. 그 어수룩함이 만들어 낸 우여곡절들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애잔하게 펼쳐진다. 역사에는 언제나 1등의 이야기만 기록된다. 각자의 일기장에나 기록될 작고 소심한 2등들의 이야기, 그 차남들의 이야기를 그는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썼다. 그 어떤 것도 이야기가 될 수 없을 법한 비루한 존재들의 삶에서 그는 기어코 이야기를 건져 올리고 만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늘진 곳을 밝게 비춘다. 삶에 대한 통찰, 재기 넘치는 문체, 선명한 주제의식, 매력적인 캐릭터, 유머와 익살, 애잔한 페이소스까지, 읽는 재미와 감동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안겨 주는 『차남들의 세계사』는 이기호 문학의 모든 것을 담아낸 이기호의 세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