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학아재 갤러리에서 한천 양상철의 ‘그림 업은 글씨’ 초대전이 열린다. 이번 초대전에서 그는 서예와 건축 그리고 회화의 세 장르를 접목해 현대서예의 정수를 선보여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서예의 정신성과 회화적 직관 융합이 두드러지는 전시작들은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의 전환과 더불어 대중들의 접근성을 높여 소통의 장을 마련한다. 학아재 갤러리 유영훈 큐레이터는 “예술의 장르를 서로 융합시켜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현 시대 예술가의 사명이며, 한천 양상철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사명감을 서예라는 영역에서 오랜 시간 담아내고 있다”고 초대 이유를 밝혔다. 이에 본지는 다원화사회, 현대서예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단호한 의지와 집념으로 심화된 저력을 표출하는 한천 양상철의 작품세계를 조명해 보았다.
기운생동한 새로운 형식
‘그림 업은 글씨’라는 테마에서 알 수 있듯, 20여점의 전시작들은 한천 특유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출하고 있다. 동서양이 만나고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시대성을 발산하는 화면은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여백(餘白)’, ‘선(線)’을 기본으로 순간적, 찰나적 붓질과 우연성을 근간으로 석고, 돌가루, 쇠붙이 등 건축 재료를 이용하면서 차별화된 기법을 창출했다. 한천은 무엇보다 동양의 기운생동한 필획을 작품에 운용한다. 그의 작품은 의사된 물상이 단순화되면서 배치된 공간을 병렬적으로 축조시켜 강렬하게 색채 대비함으로써 작품에 긴장감을 일으키고 있다. 문자(文字)는 서체의 필법과 결구를 유지하면서도 가독(可讀)의 한계를 벗어나 근원적으로 서화(書畵)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는 문자와 더불어 신석기 시대의 암각에 근원하는 듯한 상형성 부호를 사용한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서예가 회화에 묻힌 듯 보이지만, 오히려 그 속에 숭고한 서예의 정신성을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천의 화면은 명쾌한 필치 속 서정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작품에서 공간 운영의 여유로움과 함축미가 두드러지고, 필선의 유려함과 순간적 터치는 무의식의 우연성을 가미시켜 절제된 화면의 깊이와 작가의 정신을 드러낸다.
“지금은 예술도 다원화된 다양성의 시대이며, 순수의 경계가 허물어진 대중성의 시대입니다. 이제 세상도 사람도 시대의 심미도 바뀌었으니 전통도 보존의 가치로만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죠. 저는 줄곧 서예의 정수리에서 동서양극의 경계를 찾아 서예의 정신성과 회화적 직관을 융합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한천은 그간 세 가지 원칙을 두고 작업에 임해왔다. 첫째, 유년부터 공부하여 체화시킨 서예적 역량을 중심에 둔다는 것. 둘째, 생활 수단이었던 건축에서 얻은 재료지식과 심미를 이용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불협적 조화의 긴장감을 유발하도록 서구의 회화적 기법을 차용하는 것이다. “작품이 서예든, 회화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로 평가되더라도 관계가 없다”는 그는 “새로운 심미세계를 도전한 소박한 결과물로써 만족할 따름이기 때문”이라며 담백하게 소신을 밝혔다.
“예술은 숭고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세계를 순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작가로서 일상적인 붓 작업을 하는 데, 먹의 기운이 느껴지면 힐링이 되곤 하죠. 기분이 좋을 때에는 붓이 함께 춤을 춰주기도 하며, 우울할 때에는 위로와 격려를 해줍니다. 때론 그로부터 혼쭐이 나기도 하고요. 외로운 예술가의 삶에서, 진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와도 같습니다.”
고대의 감성(感性)을 회복시키는 창신(創新)의 세계
한천은 집념과 자존으로 ‘동서의 경계’에 서서 도전적으로 자기만의 개성미를 살린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고 있다. 고전의 깊이를 천착하여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하는 그는 “현 시대에 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거의 가치로만 지켜졌을 때 시대성을 잃게 됩니다. 서예도 현대인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며 현대적 미감에 맞는 창조적인 작품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전통 서예를 기반으로 실험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그는 현대적 조형작업이 곧 시대성을 찾는 길이며, 근원적으로는 서예의 원류를 탐색하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한천의 작업은 고대의 감성을 회복시키는 시간 여행자의 사유”라고 평하며 “고대적 감성의 회복, 즉흥성에서 비롯된 속도의 힘, 구성주의적 요소, 그리고 물성의 효과에 의한 질박함이 양상철의 미학이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그림과 서예가 하나가 되어 업고 업히면서 그림이 된 지점에서도 서예의 향기는 작품 곳곳에 피어나고 있다. 어머니가 자식을 가슴에 깊이 묻은 것처럼 정녕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는 확산 에너지
한천은 서단에 주목받는 중진작가로서 서예의 현대성에 고민하고 있다. 40여년이 넘게 서예계에 몸담으면서 서예미의 보편성과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는 아방가르드한 사고로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어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다.
예술은 예술가의 삶 그 자체이듯, 한천의 예술은 한천의 삶에 녹아 있다. 그는 현대예술로서의 서예 입지 확보를 위해 서예가로서 최초 서예, 건축, 회화의 장르를 접목하여 세간에 주목받고 있다. “전통의 가치는 이 시대를 관통해야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결국 예술가의 시대적 사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대에 있는 것이지요. 전통의 에너지를 현대로 끌어 모아, 확산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라며 자신만의 예술철학을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가장 한국적이면서 글로벌적인, 장르를 초월한 융합예술로서의 서예술을 추구할 것이며, 대중들에게 현대의 시대성을 시사하는 유니크(unique)한 예술가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전통 서예의 바탕 위에 작가의 화격(畵格)을 가미한 개성적 작품으로 새로운 형식에의 신선함을 안겨주는 그의 작품은 현대시대에 알맞은 다양성을 충족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道)를 구하듯 작업에 매진하는 그는 앞으로도 삶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를 전개하며, 현대 서예의 존재의미와 그 역할에 대해 지속적 성찰을 보여줄 것이다. 한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예의 정신성을 가슴에 새기고 작품에 혼을 담아 도전의식을 꽃피우고 있다. 예술의 거대한 지평과 치열하게 씨름하는 그가 앞으로도 어떤 변화 속에 새로운 사유를 가지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전개하게 될지 기대된다. 한천은 자신의 게으름을 지적하며 그의 부친이 말씀하신 ‘손이 부지런한 것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향후 한천의 부지런한 탐구정신이 그뿐 아니라 한국의 서예를 세계의 예술로 진입시키는 큰 동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정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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