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다, 날마다 심해지는 어깨 통증은 병원에 가도 원인을 알 수 없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첫사랑이 기묘한 인어가 되어 찾아왔다……. 권태에 허우적거리는 한 여자의 일상에 이상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며 공허와 종말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운다.
국립극단이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신작을 내놓는다. 9월 27일부터 10월 1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간과 강>은, 2020년 제14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으로 국립극단 프로덕션을 통해 처음으로 무대의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난다.
수상 당시 “작가의 직관은 웅숭깊고, 내면을 향한 응시는 정서적 결이 곱다. 단문의 미덕과 언어의 변주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은 <간과 강>은 파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핑퐁 게임처럼 운율감 있게 짧은 호흡으로 주고받는 대사, 파편적으로 해체된 장면과 사건, 초현실적인 상황 설정 등 정교한 인과관계 중심의 연극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기이할’ 정도다. 하지만 촉수를 세워 표현주의 그림을 보듯 감상하면 공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온몸의 감각기관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극은 L의 하루 여정을 따라 간다. 한강이 보이는 낡은 빌라에서 남편 O와 함께 살고 있는 L은 집 안에 언제 생겼는지 모를 바닥의 커다란 구멍을 내려다보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끝이 보이지 않아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다. 지하철 승강장에는 종말을 예고하며 ‘세상의 끝을 받아들일 좀비(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외치고 다니는 종말론자가 있다. L의 어깨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종말을 목전에 두고, 인간이 진화를 위해 마비시켜야만 했던 옛 감각들이 살아난 걸까?
우연히 만난 소년은 기억나지 않는 L의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까스로 기억해 낸 첫사랑은 기묘한 모습을 한 인어가 되어 나타났다. 어쩌면 인간이 진화하기 이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파편처럼 흩어진 일과 속에서 L은 긴 시간동안 공허를 들여다본다. 권태에 몸부림치며 마비됐던 감각들이 서늘하게 살아난다.
연출을 맡은 이인수는 “이 작품은 상당히 사실적인 일상 가운데 초현실적 요소가 한 가지씩 들어 있는 작품이다. 때문에 이성이 아닌 감각과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희곡을 쓴 동이향 작가와 소통할 때도 MOMA 화보집을 뒤지는 등 서로가 생각한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다”며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빗대어 N(직관형), F(감정형)인 관객분들이 보신다면, 작품 곳곳에 숨겨 둔 요소를 한층 풍부하게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장난기 어린 ‘꿀팁’을 전했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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