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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 사이의 모호한 경계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 2020년 03월호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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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개인전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가 오는 3월 31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된다.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주로 거울 등을 이용한 시각적 착시를 적용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설치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작품성과 동시에 대중성을 입증하며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현대미술 작가이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이 가능한 그의 작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베니스 비엔날레(2001, 2005년), 휘트니 비엔날레(2000년) 등의 미술 행사를 비롯해 PS1 MoMA(뉴욕), 바비칸 센터(런던), 모리미술관(도쿄), MALBA(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작가가 주로 다루었던 ‘인식’이라는 주제에서 나아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허구와 실재의 공간이 공존하는 그의 설치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이는 것이 실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하며 ‘인식의 문제’와 ‘헤테로토피아’ 등 철학적 주제까지 아우른다. 이전의 전시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실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환영과 실재’, ‘허구와 진실’ 등의 개념을 주로 드러냈다면, 이번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는 ‘나’(혹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모호한, 비고정적인 경계에 주목한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에 대한 이 같은 작가의 관심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해 상반된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남북한을 둘러싼 유동적인 정세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 제3세계 국적을 가진 레안드로 에를리치에게 남한과 북한은 그 어느 쪽도 중립적인 대상으로 두 사회는 서로를 통해 각자의 성격과 정체성을 규정한다. 하나의 개별 주체의 의미와 본성은 주변 조건에 따라 변하며, 고정된 본성이나 실체는 없다. 역으로 타자의 의미와 본성 역시, 이를 인식하는 주체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되었던 두 개의 대상을 구분 짓는 경계는 조건과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가변적인 것이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비고정적인 경계에 대한 이 같은 사유는 개별 존재에 대한 것으로 추상화되기도 하고,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확장되기도 하며 작가가 다루었던 인식의 불완전성에 새로운 층위를 더한다.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영화 포스터 13점으로 구성된 공간인 <커밍 순>으로 시작한다. <커밍 순>은 레안드로 에를리치가 어린 시절 본인의 상상력과 영감을 키워주었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만들어낸 공간으로, 작품의 본래 맥락에서 벗어나 이미지에서만 출발해 자유롭게 이름 붙여진 영화 포스터들은 관람객에게 작품에 대한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음으로 작품마다 색다른 체험요소가 있는 <더 뷰>, <엘리베이터 미로>, <탈의실>, <잃어버린 정원> 등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탈의실, 정원, 엘리베이터 등 친숙한 공간 혹은 건축적 요소를 활용한 이들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관습적인 지각과 인식에 대한 동요를 경험하게 한다.
이어 만나게 되는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탑의 그림자>와 <자동차 극장> 등의 공간설치 작품으로 대형 스케일로 압도감을 선사한다.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탑의 그림자>는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인기작인 <수영장>의 구조를 발전시킨 것으로 석가탑의 또 다른 이름인 ‘무영탑’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특별히 제작한 신작이다.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이야기 속의 반영 이미지를 실제 물리적 공간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이러한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의 투영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바깥에서 수면을 바라보았을 때와 작품 안에서 수면을 올려다볼 때 관람객이 경험하게 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자동차 극장>은 모래 자동차 13대로 구성된 작품으로 영상 속 자동차와 모래 자동차 사이의 시선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 주체와 타자, 물질과 이미지 등에 대한 시선의 교차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남한, 북한 지도를 모티브로 한 조각 작품 <구름(남한, 북한)>으로 전시를 마무리한다.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작품에서는 상반되는 것들이 공존하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해진다. 이번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전은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전시로, 세계적인 수준의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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