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이들이 온갖 이유로 이곳을 다녀갔다. 소설을 쓰려, 시상을 얻으려, 그림 그리려, 휴양하러.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의 축구영웅 박지성 씨가 신혼여행 당시 방문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지중해의 원조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섬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 카프리를 사랑했다. 이스키아 섬을 소유했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카프리를 한 번 보고는 반해버려서, 네 배나 넓은 이스키아 섬과 카프리를 바꾸어 이곳에서 10년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12채의 별장을 짓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후 말년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그의 유언장이 5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낭독된다. "무자비한 운명이 나에게서 두 아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앗아가 버린 이상, 티베리우스에게 유산의 2/3을 물려줄 것을 언명하노라." 집안으로만 보면 아우구스투스 가문을 능가하는 귀족 출신이지만 55세 생일을 앞 둔 티베리우스의 치세가 이제야 시작되었다. 출생부터 황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의 치세는 굴욕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리는 데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려했던 수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고 자신에 대한 비난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공화정과 민주원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티베리우스의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이 티베리우스를 '주인님'(도미누스)이라고 부르자, 티베리우스는 화를 내며 "다시는 나를 그딴 모욕적인 말로 부르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했지만, 재정 낭비 중단을 위한 대책으로 황제 주최의 전차경기대회나 검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민심에 반하는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지지도는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기 19년에 일어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그의 치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건이 되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인물이었는데, 동방에 파견되어 시리아 총독인 피소와의 불화 끝에 급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사주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이것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였다는 소문과 결부되면서 의혹이 끊임없이 커져갔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란거리이지만, 서기 23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마저 급사하며 그의 제국 통치에 대한 동력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이후 서기 26년부터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고, 서기 37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이 섬에 12채의 빌라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황제의 빌라 유적지는 이 섬 전체에 널려 있다. 하지만 흔적만 남아 있고 제대로 모양을 유추할 수 있는 유적은 3개 밖에 안 된다. 빌라 요비스, 빌라 다메쿠타, 팔라초 아 마레. 그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빌라 요비스이다. 황제의 빌라라고 해서 아름다운 궁전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궁전이라기 보단 절벽 위의 공원 안에 있는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정도이다. 수도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로마시대 유적지와는 다르게 관리나 보존상태가 훌륭하지 않지만, 굽이굽이 언덕길을 올라 찾아간 빌라 요비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렌토 반도와 지중해의 모습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2천 년 전의 티베리우스가 내려다 본 풍광도 이토록 아름다웠으리라. 동시에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져 맘 한구석이 짠해졌다. 글·사진 : 김원석 / 제공 :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 02-723-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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