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히어로들이 전 세계를 장악했다. 아이언 맨,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등 이름만 들어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히어로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는 전 세계에 두터운 팬덤을 확보하며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유독 스릴러 영화만 과다 탄생하며 균형 있는 장르형성에 애를 먹고 있다. 특히 액션 장르는 좀처럼 보기 어렵고 액션 히어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배우가 칼을 뽑아 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총을 손에 쥐며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대역의 도움 없이 험난한 액션을 모두 소화해내 감탄을 자아냈다. 역시 국민배우이고 역시 안성기다.
최근 개봉한 영화 <사냥>은 ‘액션 배우’ 안성기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연기하는 ‘기성’이란 인물은 마치 람보를 연상시키며 굵은 탄환을 어깨에 두르고 험하고 고된 숲속을 바람처럼 질주하는 노인이다. 기성에게는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예리가 연기한 소녀 ‘양순’이다. 산 속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금을 차지하기 위해 금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이들을 사냥하려는 엽사들에 맞서 노인 기성은 소녀를 지켜야 하는 스스로의 미션이 주어진 것. 그리고 이 미션을 수행하고자 엽사들과 한판승부를 벌일 때 기성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스크린에 뽐낸다. 수입산 히어로들의 활약만을 지켜봐야했던 우리나라관객들에게 모처럼 찾아온 히어로 할아버지의 등장이다.
이처럼 안성기는 영화 <사냥>을 통해 인생일대의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백발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은 이 영화에서 안성기의 아이덴티티와도 같다. 영화 <사냥>에서는 안성기의 기존 트레이드마크인 젠틀함과 중후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다. 연기 인생 59년만의 파격변신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안성기는 영화 <사냥>에 대해 “기성은 굉장한 상처를 지닌 인물이다. 시나리오에서는 과거 회상의 비중이 많았는데 영화에선 축소됐다. 상대적으로 회상보다 추격이 많은데 이게 영화적으로는 더 맞는 것 같다”며 “상처가 있는 사람이 추격전을 통해 지켜야 할 사람을 보호하면서 정신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연스러워지는 모습도 좋았다”고 전했다.
<사냥>에서 안성기의 진가는 가파른 산을 제 집 마냥 뛰어다닐 때 여지없이 드러난다. 조진웅, 권율 등 젊은 배우들보다 더 빠르게 뛸 정도로 그는 후배들 앞에서 무한 체력을 뽐냈다고 한다. “기성을 만나 매우 흥분됐고 즐거웠다. 젊었을 때도 해보지 못한 액션연기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줄곧 해왔던 것이 아닌 의외의 모습을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더 나아가 이 모습을 관객이 좋게 받아들인다면 나 스스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기성이란 역할은 내게 행복한 도전이었다.”
이렇듯 어느덧 60대 중반이 된 안성기가 액션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더군다나 한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말이다. 이는 분명 설 자리를 잃어가던 비슷한 연령대의 배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건이자 후배 배우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방향성을 제공한 것이다. 그는 “외국에서는 내 또래의 배우들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액션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기획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반해 국내 영화계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이러한 기회가 온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며 “<사냥>이라는 영화가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 주류에서 물러나 있는 나이든 배우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작품이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따금씩은 기획됐으면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지난 6월 29일 개봉한 <사냥>은 큰 기대와는 다르게 7월 14일 현재 기준 누적 관객 수 644,662명을 기록 중이다. 이와 함께 상영관의 수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 영화적으로 미흡했던 점들이 쌓여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렸다는 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이 된 것. 하지만 이 모든 결함들이 오히려 안성기의 독보적인 연기력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고. 그는 한없이 흩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의 결함을 연기 장인의 경지에 다다른 듯 섬세한 표정 연기로 일관되게 채워 넣으며 고군분투하였다. 오랜만에 상업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기에 흥행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명품 연기를 선보여 자신의 경쟁력을 대내외에 알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는 후문.
그는 기존에 접하지 못한 캐릭터를 마주하게 되면 아직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말한다. 60년 가까운 경력에 안 해본 캐릭터가 없을 것 같은데 여전히 그는 호기심 많은 청년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안성기는 “아직도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싶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고 싶다. 그렇게 만나는 현장의 식구들이 참 좋다”면서 “가수가 히트곡이 적으면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설레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배우는 매번 새로운 인물과 사람, 환경을 만난다. 모든 게 새로움의 연속이라는 사실이 나를 항상 설레게 한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선배, 동료 배우들이 떠난 충무로 현장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안성기.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며 영화 <사냥>에서도 명품 연기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이런 그가 최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워낭소리>를 연출한 이충렬 감독의 신작 <매미소리>다. 안성기의 극중 역할은 상갓집에 가서 분위기를 띄워 슬픔을 잊게 하는 진도 다시래기꾼이라고. 안성기는 이렇듯 또 다시 연기 변신을 준비하며 인생의 도전을 즐기고 있다. 그의 연기 인생은 여전히 1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