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기생화산 ‘오름’의 연작을 펼치며 삶과 예술에 대한 사유를 화폭에 담는 백광익 화백. 그는 지난 35년 몸담아온 교직을 명예롭게 떠나 제주 대정읍 무릉리에 위치한 (사)제주국제예술센터를 운영하며 제주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국제교류전시 및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백화백의 독창적 화면은 무한한 시공간 속 대자연의 우주적 질서를 표출하고 있으며, 은유와 상징의 기호로서 신비로운 자연의 빛을 담고 있는 대서사시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주의 자연이 곧 무릉도원”이라고 밝힌 화백 백광익은 아름다운 제주 풍광에 취해,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오름은 제주의 시작이고, 아픔이며, 기쁨입니다. 제주인은 오름 자락에서 나고 자라 생활하다가 끝내 오름의 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오름이야말로 제주인들의 어머니 품이기에, 그 따스함을 화폭에 그리고 싶었습니다.”
백광익 화백의 화폭은 복잡한 사회구조 속 인간성이 상실되고 삶의 피폐성이 고조되는 이 때, 심신의 안정과 더불어 여유와 용서, 너그러움, 나아가 자연에의 순응을 보여준다. 주로 어둠의 색이 주를 이뤘던 과거와 달리 최근 밝은 색조로 변화하는 그의 작품은 3년 전 간암 판정을 받고, 치료에 전념하며 다시금 삶의 중요성을 절감한 작가의 진심이 반영됐다. 가슴 시리도록 푸르게 채색된 청아한 오름은 장엄하고도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근작에서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을 접목한 애로티시즘(eroticism)으로 범위를 넓혀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름의 아이덴티티는 그의 평소 인상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여 매력을 더한다. 즉, 화폭은 작가의 강렬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매를 닮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으며, 이면에는 부드럽고 선한 마음을 지닌 그의 심성이 반영돼 섬세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캔버스의 한계성을 깨트려 파격적인 작업을 하는 그는 ‘오름’이라는 제주섬 특유의 자연적 대상을 소재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전개되는 자연의 질서와 감흥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고 있다.
백화백은 1970년대 후반 관점동인 창립과 창작미술협회 공모전 수상을 계기로 부적-기매-오름 연작으로 이어졌다. 1984년부터 구축된 그의 화풍은 제주 자연의 색으로서, 작업의 소재는 오름과 바람, 그리고 별이다. 제주 전역에 흩어진 360여개 오름의 절묘한 능선의 형상을 차별화된 기법으로 표현했다. 누워있는 여인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게 묘사된 오름은 모태성징의 표상으로 제주인들의 마음을 대자연으로 연계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일찍이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연인의 심정으로 오름 작업을 해왔다”고 밝힌 백화백은 오름과 오름 위에 펼쳐지는 유성, 대기, 별, 바람, 달 등을 신비롭게 표현하며, 무한한 시공간의 우주적 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하늘에 펼쳐지는 다양한 형상의 선들과 점 그리고 색면들은 화면에서 시각적 울림을 만들어내면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더한다. 작가는 이러한 감동의 느낌을 “오름 위를 스치는 별소리, 바람소리, 살아있는 숨소리, 자연의 소리”로 설명하고 있다.
퇴임 후 작업에만 전념하는 작가에게 삶의 변화는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원래 나는 학교와 그림 밖에는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전에도 학교에 작업실이 있다 보니 출퇴근이 따로 없었고, 지금도 폐교된 학교 작업실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눈을 뜨면 작업실에 들어와 그림에 몰두한다. 다시 태어난 인생인 만큼 후회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싶다”라며 담담히 말했다. 이어 그는 “일찍이 정년 후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폐교를 임대하여 전시장 겸 게스트하우스인 제주국제예술센터를 지었고, 앞으로 국제교류전시와 작품 판매 활성화에 힘을 쏟는 등 다각도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라며 포부를 다졌다.
시류에 흔들림 없이 고유한 형상세계를 천착하고 있는 백광익 화백. 그는 신념과 목표가 뚜렷한 예술인으로서 독자적인 시각과 감성으로 그만의 화풍을 구축하고 있었다. 백화백은 앞으로도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알리는 작품세계를 이어갈 것이며, 지역의 예술문화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밝혔다. 무릉리에서 돌아오는 길, 창 밖 너머 펼쳐진 붉은 노을은 장관이었다. 작가의 에너지가 뜨겁게 샘솟아, 하늘 가득 붉은 빛으로 채우는 것 같았다. 제주의 화가로서, 그의 남다른 애향심이 담긴 예술 행보에 행운이 따르길 바라며, 모쪼록 건강을 유지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길 소망한다.
백광익은 1952년 제주 출생으로 오현고와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1986년 동인미술관을 시작으로 일본, 미국, 중국 초대전 등 28회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단체전 및 초대전에 참여했다. 1995년 제주 프레비엔날레 운영위원장, 2005년 아시아미술제 운영위원장을 거쳐 한국미술협회 이사, 남부현대미술협회 부이사장, 제주국제아트페어 운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녹조근정훈장 및 2회의 문화체육부 장관 표창(96, 98)과 대통령 표창(2002)을 수상한 바 있다. 정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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