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을 대표하는 예술인으로서 한평생 지·필·묵을 벗해온 운곡 김동연 선생. 그는 정통필법을 바탕으로 서도에 정진해온 국내 서단의 중견작가다. 운곡선생은 지난 40여 년간 법첩을 통해 전통서체를 두루 섭렵하고, 옛 성현들의 지혜와 철학을 담아 국내외적으로 작품세계를 넓혀나갔으며, 충북서예계의 구심점 역할을 통해 후학양성과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이에 본지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기운생동(氣韻生動)한 작품세계를 펼치며 한국 서예문화 활성화를 선도하는 운곡선생을 만나 묵향을 오롯이 드리운 예인의 삶을 조명해봤다.
문자의 혼 깃든 청주에서 격조 높은 창작활동 펼치다
세계문자문화의 중심, 청주에는 한국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며, 자긍심을 갖고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많다. 그 중심에서 격조 높은 창작활동을 펼치며, 지역 문화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운곡선생을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동아시아문화도시 청주에 서예문화 부흥을 위하여 해동연서회를 창립했으며, 지속적인 공모전, 국제교류전,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서예의 대중화에 힘써왔다. 또 전국여류서예대회, 한·중 서예교류전, CJB청주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등 각종 서예대회와 공모전을 개최하여 문화예술의 저변확대와 해외교류 활성화에 기여했다. 특히 해외 교류 사업에 노력을 기울인 운곡선생은 중국, 대만, 일본 등과의 교류전을 통해 한글서예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 초석을 다졌으며, CJB청주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운영위원장으로서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의 문화적 가치와 고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10여 년간 청주예총의 수장으로서 지역사회 예술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지난 5년 전부터 (사)세계문자서예협회 이사장을 맡아 세계문자의 네트워크 축을 형성,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및 ‘동아시아문자문화페스티벌’ 등을 개최하여 문자로 통하는 축제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사람 그리고 문자의 향기’의 테마로 열린 ‘동아시아문자문화페스티벌’은 한글과 한문, 일본문, 내몽고문, 위구르문, 동파문, 이족문, 여서문의 전시와 중국 장영 선생의 특별초대전, 한중일 학생서예전, 한중일 여류서예전,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등 다채롭게 선보였다. 이에 운곡선생은 “동아시아 나라마다 고유의 문자와 언어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했다"며 ”페스티벌을 통해 각 나라 문자 서예의 예술적 감성을 공유하고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표했다. 금년 5월에도 중국한자박물관에서 세계문자서예대전입상작전과 한글정예작가서예전으로 초대 전시되며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중국상지시비림원소재 세계문자대표작가탁본전시도 주관할 예정이다.
(사)해동연서회… 충북지역 서예문화의 기틀 마련
(사)해동연서회는 사단법인 예술단체로서 서예문화의 창달을 목표로 하는 단체이다. 충청도 서예가들의 모임으로서 지역의 서예문화 발전과 진흥을 목적으로 한다. 1971년 운곡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창립되었으며, 1972년부터 매년 회원전을 개최하였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초등학교 서예교사 강습, 서예장학생 선발 지도, 교도소 서예반 과정 설치를 해왔으며, 이를 문광부 사회교육사업 등으로 이어왔다. 또 충청휘호대전, 전국여류서예대회, 가훈서예대전, 국제교류전(한·중·일)을 개최하였으며 일본, 대만, 중국 등과 국제서예교류를 활발히 이행해왔다. 또한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을 주관하고, 세계문자서예협회를 출생시켰으며 국제학술서예세미나 등 수많은 사업을 전개하면서 다수의 서예지도자를 배출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청주지역 서예문화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바 있다.
소년명필로서 ‘김선비’라는 별칭 얻다
운곡선생은 1948년 충남 연기군 출생이다. 일찍이 붓글씨에 소질을 보였으며, 쌍류초등학교 재학당시, 담임교사였던 안춘희 선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6학년 졸업 무렵에는 서당의 유기준 훈장선생의 글씨를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에 놀라워하며, “일주일만 운필법을 배우면 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운곡선생이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운곡선생은 조치원중학교 입학시험에서도 미술교사의 눈에 띄어 환경정리를 도맡아 했으며, 상장쓰기에도 그의 글씨를 담았다. 하지만 조치원상고에 진학하면서 예술과 무관한 학과수업에 어려움을 느꼈다. 이러한 고민을 간파한 국어교사는 운곡선생의 예술적 끼를 인정하며, ‘김선비’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충북의 유명 서예가 금기풍 선생을 소개하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운곡선생은 금기풍 선생과의 짧지만 강했던 만남 뒤로 서예가로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됐다. 그는 고교졸업 후 청주대 행정학과에 입학하면서 서예에 대한 열정을 구체화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청주에서 최초 해동연서회를 결성하고 회원들을 결집했다. 또 청주대학교에 서도연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아 교내 서예 열기를 샘솟게 했다. 붓글씨의 열망은 군생활까지 이어졌다. 군복무 당시 인사과에서 상훈작성을 전담했고, 전역후 공채를 통해 청주대학교 교무과에 입사해 낮에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서실에서 원생을 지도하면서 바쁜 생활을 보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그의 실력이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강의요청이 쇄도했다. 1978년 이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에 서예 강사로 출강한 이래 목원대, 대전대, 공군사관학교, 한남대, 한국교원대, 청주교대, 청주대, 서원대에서 후학양성에 열정을 쏟았다.
느긋하며 여유로움이 있는 운곡선생의 서체
운곡선생의 작품세계는 부드러움과 강함이 적절히 배합된 조화의 세계다. 한글은 예서의 느긋하면서도 부드러운 원필이 겸양의 미덕으로 살아온 인생관과 근본을 중시해온 운곡선생의 예술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대학교 1학년 방학기간 중 장암 이곤순 선생과 함께 서울의 동방연서회 특강을 1개월 수강하였던 때를 잊지 못한다. 이 강좌에서 당나라 이전의 글씨를 임서하는 것이 자신의 글씨를 쓰는데 좋다는 가르침을 받아 이때부터 고전 자료를 구해 부지런히 글씨를 썼다. 한문서예 안진경체는 글씨의 골격이 되었으며, 안진경의 <안근례비>를 통해 해서의 기본을 익히고 한 대의 예서를 즐겨 임서했으며 특히 조전비는 그에게 애정과 관심의 법첩이다. 한글서예는 일중 김충현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글을 쓰는 뼈대가 되었으며 한글 고체는 광개토왕비와 접목한 한글 특유의 양식을 만들어 자기예술로 승화시켰다. 날카로움보다 유려함이 있고 내면에 강인함과 순조로움이 내포되어 있으며 느긋한 여유로움이 풍기는 그의 글씨에 영향을 미친것도 수많은 예서를 임서함에 나온 필력이다. 운곡 선생은 74년부터 국전에 출품하여 5번의 입선과 84, 85년 미술대전에 연특선을 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등단하였다.
현재까지 선생이 휘호한 금석물과 현판류는 150여점이 넘는다. 한 점 한 점 정성을 모아 휘호한 역작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 출간할 예정이다. 이렇게 다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북 대표로 나갈 정도로 국궁과 30리길 통학의 체력덕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생을 다하는 날까지 부지런히 붓을 들고 생각을 써나가면 반드시 하나의 작은 산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임서에 매진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고된 수행으로 탄생된 운곡 선생의 작품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 인격과 이상이 담겨있다. 매사에 진실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며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작업에 몰두하는 운곡 김동연 선생. 그의 땀과 정성이 담긴 작품들은 후세의 값진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앞으로도 한국 서예의 세계화를 도모하며 한류의 문화 전령사가 되어 서예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나가길 바란다. 정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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