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일생은 자기 언어를 찾는 고행의 작업이다. 그 까닭은 예술이라는 자체가 작가의 자화상이요, 작가정신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로서 독자적 예술양식을 정립한다는 것은 일생의 과제이며, 그 작업이 심화되고 섭렵의 폭이 넓을수록 완성의 길은 고되다. 사유의 화가 염효란의 화폭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예술가의 고뇌가 담겨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 현대인의 이중적 가면 뒤에 숨겨진 내적 욕망,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 상처투성이의 자아를 파격적인 구도와 표현양식으로 그려낸다. 파편화된 인간의 얼굴에 복합적 심리를 표출, 독특한 기법과 화면구성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이에 본지는 매사 예술세계를 추구하며, 창작과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염효란 화가를 만나 'FACE 시리즈'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주목했다.
보편성을 거부하는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예술세계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는 작가나 관람자나 마찬가지다. 염효란의 세상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이 세상에서 그녀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삶을 살았다 해도 과연 몇 명이나 그와 흡사한 감정을 느끼고, 유사한 표현을 표출해낼까 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의 내면을 꿰뚫어볼 줄 아는 마음의 눈과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알아챌 수 있는 판단의 눈을 가진 것 같다. 순수한 표정 뒤에 숨겨진 타락한 모습들, 권력과 돈을 탐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화면에 무섭도록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식적인 현대인들 속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보편성을 거부하는 독자적인 감정의 세계, 다소 불편한 진실과 복합적 감정이 담긴 염효란의 세상이 미술계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염효란은 밝은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반전이 있다. 검은 뿔테안경 너머로 비치는 순수한 눈빛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평온하지만, 작품에 관해서만큼은 심오하고, 진지한 성찰의 무게를 담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 고통스러운 표정과 고독의 시선이 작가의 내면에 자리한 슬픔의 깊이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가늠케 한다.
화면 속 기괴한 형상들은 작가 자신의 얼굴이자 영혼의 그림자다. 속박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온을 꿈꾸지만,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현실과 이상, 좌절과 희망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의 자화상적 이미지를 드러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프다. 체념한 듯 웃고 있는 얼굴이 절망의 깊이를 더한다.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고통에 순응하며 즐기는 것도 같지만, 음울한 표정에 자리한 잔주름 같은 무수한 균열들은 마치 혈관에서 터져 나오는 잿빛 눈물 같기도 하다.
또한, 작가의 화폭에는 삶의 고단함이 담겨있다. 근작에서 손과 발의 수가 늘고, 이미지들이 겹쳐서 등장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작품연구와 다수의 수업으로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상 속 쌓여가는 고단함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고독하게 표출하고 있다.
염효란 화가는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유난히 독특한 감성과 유별난 방식으로 그림을 표현해왔다. 다수의 취향에 자신의 경험을 대입시키거나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보편화하지 않는다. 자신을 널리 알리고 사랑받기 위해 대중취향적 표현방식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국내외 미술계 도처에서 인기지상주의가 만연한 이때, 보기 드문 도전적인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 ‘고뇌와 자아성찰’, 그리고 ‘관계를 통한 치유’가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나를 되돌아보고, 수많은 인간관계 속 연결고리들을 다시금 풀어보고, 되짚어보게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 세상과 소통하는 감성의 통로다”
염효란 작가에게 있어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FACE>시리즈로 담아내는 작업은 세상과의 소통의 통로다. 사회적 억압이라는 베일 속에 가려진 내적 욕망을 그만의 언어로 분출시키는 작업은 고된 일상을 벗어나 일말의 희망을 찾는 과정임과 동시에 고독한 내면을 위로하는 행위와 같다. 그래서 진솔하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평범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내면에 담긴 감정의 파편들을 풀어내는 일은 그녀에게 쉽지 않다. 가슴 속 감정의 무게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비밀스러운 자신의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아내면서 때론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결국 그가 외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 그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결국 그의 작업은 그녀 삶의 반영으로써, 고독, 불안감, 갈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치유적 감정들을 드러내는 심리적 공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 속의 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오빠들만 있고, 나는 없는 것 같았고, 성장한 후에는 나는 없고 일하는 여자만 있는 것 같네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오직 책임감을 위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역시 나한테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맞춰져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근작에서 보다 새로운 재료와 강렬한 색채가 눈길을 끈다. 한동안 밝은 그림으로 장식하고 숨기려했던 내면을 한층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캔버스에 유화, 아크릴, 연필의 'Mixed Media' 작업을 추구한 독창적인 표면처리는 거친듯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럽다. 염 화가는 향후 기존 틀에서 재료와 기법에 변화를 주어 색다른 페이스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솔직한 작품을 할 것”
대중적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도 많이 듣는다. 소위 ‘거실취향’에 부응하는 ‘예쁜 그림’을 그리라고. 하지만 염효란 작가는 남들 시선 의식하고, 포장하고 싶지 않다. 그림만큼은 고집을 지켜나갈 것이다.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물욕에 얽매이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녀는 “작품을 하는 것은 그림일기 쓰듯, 내 솔직한 심리를 담아내는 공간이다”라며 “앞으로도 내 감정에 솔직한 내 길을 가겠다”고 단언했다. 보기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이 진정한 예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염효란 작가는 철저히 자의식과 내면세계 안에서 자신이 가진 렌즈를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한다. 감정을 걸러내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면 그의 그림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고지식할 정도로 타협할 줄 모르는 염효란 작가는 유행과 인기몰이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도 그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펼치며, 독자적인 자리를 굳힐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인터뷰 말미, 염효란 작가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제자들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내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희열도 있지만, 지도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더욱 크다”라며 “앞으로 제자들과 내가 서로 윈-윈하는 작가의 길을 걷고 싶다”고 밝히며 남다른 제자사랑을 표하기도 했다. 각종 미술단체에서 활약하고 있는 염 화가는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잡지 않듯, 한번 맺은 인연은 상대가 떠나지 않는 한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 했다. 서로 믿고 도우며 신뢰를 쌓듯, 그녀 또한 인간관계 속에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특별한 이유를 갖는다. 앞으로 그만의 예술철학과 기발한 발상으로 탄생될 새로운 작품들이 기대된다.
염효란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과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 11회 및 프랑스 파리 루브르 아트페어 외 국내 다수의 단체전 및 초대전, 아트페어에 참여하여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았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대한민국 현대조형미술대전, 신미술대전, 신상미술대전, 국토해양환경미술대전 등에서 다수의 심사경력을 갖고 있다. 현재 현대여성미술대전 운영위원, 한국미술협회, 서울미술협회, 안성미술협회, 경기도미술협회, 에꼴, 현대여성미술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안성시립도서관 강사, 예원예술대학교, 춘천한림성심대학교 외래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정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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